작업 노트

작업 노트
나는 들어간다. 옥수동, 12지구안으로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존재적 가치와 아름다움은 발견될 수 있다. 비록 남겨지고 버려진 것일지라도.
철거를 앞둔 옥수동 12지구. 그곳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잊히고 버려진 채 남겨진 공간이 있었다. 풍경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낯선 공간, 지나친 적막, 오싹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아 저절로 경계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철거’라는 임박한 종말 앞에 놓인 공간이란 생각에 쓸쓸하고 음산한 풍경임에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적 당위성과 개성, 아름다움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과 빛, 기억이라는 텍스처로 버려진 데에 대한 서운함과 이별의 아픔을 표현하고, 곰팡이와 먼지로 한 폭의 수묵화와 선화(禪畵)를 그려냈으며, 비와 바람으로 무상의 장면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과거 타인들이 부여한 가치와 소유의 의미로부터 해방되었고, 더 이상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정지된 시간이지만 이보다 더 현실적으로 무상을 대변해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이들의 존재는 먼지가 되어 또 다른 존재의 한 부분으로 새로운 기억을 꾸려갈 것이다.
018
사라질 것들이 침묵 속에 펼친 스토리의 일부를 살아있는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재건축의 위세에 눌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묻혀 있던 죽은 세상은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 빛과 바람, 시간, 추억들이 한데 어우러진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자체로 독창적이고 매력적이었다. 현실이 가리고 있던 소중한 어떤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은 동일한 것이 없다. 각자 나름의 기억과 쓸모, 감정을 기록하고 있다. 남겨진 물건은 남겨진 채로 어떤 이들의 기억과 감정을 상기시키곤 한다. 시간을 머금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 같다.
한때 각각의 건물과 방은 고립되고 분리된 세상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한 구분이었다. 인간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어 놓은 일종의 ‘금’이었다. 그러다 차츰 인간의 발길이 끊기고, 모호해진 경계는 하나의 거대하고 고독한 덩어리가 되었다.
남겨지고, 버려지고, 없어질 것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지 모르겠다. 혹은 남아있는 공간과 감정에 호흡을 맞추다 보니 추억으로 빠져드는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변엔 우리의 인식 너머로 희미해진 공간이 많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간에 일단 무언가 알아차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공간을 탐색하다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내 안에 숨어있던 기억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존재의 명명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없어지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과거에 가졌던 고유의 의미와 가치에 새로움을 더하는 채색의 과정을 거쳐 색다른 존재로 재탄생할 것이다.
Greennet Palace
ss_5162
어느 날 운전을 하던 중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산 능선 사이로 강렬한 초록 불빛이 퍼지고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세는 강렬했다. 마치 산 너머 외계함대가 착륙한 것 아닌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의문의 순간을 목격한 뒤로 난 불빛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침내 알게 된 사실은 빛의 근원이 ‘골프연습장’이라는 것이었다. 이목을 끌었던 골프연습장은 밤이면 초록빛을 뿜어냈고, 낮과는 다른 위상을 드러냈다. 화려하고 웅장하며, 때로는 수많은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어떤 것이 문득 새롭게 각인됐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오롯하게 서서 강렬한 초록빛을 퍼뜨리는 골프연습장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려 한다.
거기는 ‘초록 그물 궁전’이라고.
작성류가헌
편집한지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