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고창신(法古創新)

법고창신(法古創新)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
1. 토대
불빛이 희미해진다. 심지가 스스로 제 몸을 꼰다. 호롱을 든다. 가볍네, 기름을 채워야 한다. 오늘 이 공부는 끝마쳐야 하는데. 나랏님의 은덕 덕에 내게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실제로 뽑혔다는 사람은 본 적 없지만…. 모르는 일이다. 내가 처음이 될 수도 있잖아. 내가 급제를 하게 되면, 그래서 관리가 되면 반드시 적어도 굶어 죽는 백성이 없게 만들 것이다. 엊그제 아랫마을 갓난아기가 젖을 못 빨아 죽었다고 들었다. 어디 묻었다는데 아기 무덤은 너무 작아서 찾을 수가 없었다.
쌀을 내다 파는 아버지는 늘 나보고 자기를 닮아 머리가 좋다고 말한다. 머리가 좋으면 뭐해, 낮 동안 죽어라 일하느라 공부를 못해 아직 못 읽는 단어도 있다. 오늘 밤도 결국 글씨가 어둠에 잡아 먹혔다. 덮자. 여기 까지다. 차갑게 식어가는 벽에 머리를 기댄다. 달빛이 창호지를 뚫고 옅은 푸른빛으로 바닥에 나앉는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나도 기왓장 밑에서 태어났다면 낮 동안에 쉬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 오늘은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논에 거름을 주려다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은 벼들을 잔뜩 밟아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났다. 평소에 절대 하지 않는 실수인데. 더워서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가 들고 오시던 새참을 다 던져버리고 말리지 않았더라면 공부를 못할 정도로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일 비가 와야 할 텐데. 며칠 째 가뭄이라 아버지가 무지 예민하시다.
누구나 똑같이 공부해서 누구나 좋은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이 배운다면…. 지난 번에 장시가 서던 날 순돌이랑 길을 돌아다니며 이런 얘기를 하다가 지나가던 양반님께 뺨을 맞았다. 아직도 얼얼한 것 같다. 아무래도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냇가 쪽으로 가면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반딧불이 몇 마리는 있을 것이다. 내가 정말 이 짓까지 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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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의 냇가는 늘 조심해야 하는 장소이다. 언제 호랑이가 나타날 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냇가 물도 다 말라 있었다. 물을 먹으러 찾아오는 사슴 따위는 없을 것이다. 호랑이도 그걸 알고 있길 바라야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물이 고여 있는 풀숲에 반짝 반짝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들이 보인다. 녀석들을 잡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잡으려 하면 제 몸의 불을 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달밤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겨우 다섯 마리를 잡았다. 이 정도로는 택도 없을 것이다. 체력도 다 써 공부를 할 자신도 없었다. 면보에 잡힌 다섯 마리를 놓아줬다. 살았다 싶었는지 재빠르게 하늘로 포르르 날아가버렸다. 올려다 본 하늘엔 별이 수놓아져 있다. 저 별 만 싹 쓸어 모은다면 불을 밝힐 수 있을 텐데. 오늘 따라 얄밉게도 별이 밝게 빛난다.

2. 기둥과 벽

“바람이 불어 고개를 들었다.”
‘바라미 부러’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회초리가 내 손을 세게 내리쳤다. 연필이 내 손을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따이!(痛い!)”
내 말에 어머니는 눈에 불 심지를 키고 더 아프게 내 손을 때리셨다.
“아버지가 조선어사전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놈이라는 것이 아직도 이 쉬운 맞춤법 하나를 못 맞추느냐?”
어머니의 혹독한 말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어떡하라는 거야. 눈물이 뚝뚝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어머니는 끝까지 나를 호랑이처럼 노려보시다가 일어나 방을 나가셨다. 나는 그 때서야 소리내서 엉엉 울었다. 일본어로도, 조선어로도 악을 쓰며 울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건 온통 황국어인데. 왜 집에 와서 다시 조선어를 배워야 하는 거지? 매일 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 배우는 조선어가 너무 미웠다. 펑펑 울어 눈이 퉁퉁 불자 졸음이 더 쏟아진다.
누군가 손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나는 너무 놀라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어머니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이 붉게 달아오른 내 손등만 쓰다듬으셨다. 작게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고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해서 다시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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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하늘이 아름답다.”
‘별이 빛나는 하늘이 아름답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셨다. 미소도 아니고 화가 나신 것도 아니고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쁘신 건지 모르겠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잘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는 나의 어깨를 한 번 잡으시더니 방 밖으로 나가셨다. 회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휙, 하고 던져지고 땅에 박히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나는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이제 맞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이제 어머니의 눈물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종이를 들고 나는 어머니께 달려갔다. 어머니를 꼭 안고 내 종이를 쫙 펼쳤다. ‘별’을 가리키고 하늘을 가리켰다. 밝게 빛나는 별이 나와 어머니와 ‘별’을 비추었다.

3. 지붕

또. 또 날아갔다. 빌어먹을 회사, 컴퓨터라도 좋은 걸 사주고 뭘 하라고 해도 하라 그럴 것이지. 9시를 훌쩍 넘긴 시간. 점심은 고사하고 저녁도 먹지 못했다. 이러다 과로사로 죽으면 우리 가족들에게 산재처리 해줄까? 아이 됐다. 야근수당도 안 주는 회사에 뭘 바라. 의자를 굴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머리가 띵하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혈액순환이 안 되는 것 같다. 부모님한테 큰 까페를 물려받은 친구 놈은 요가를 하라고 한다. 할 시간이 있어야 하지, 할 시간이. 집에 가면 골아 떨어져 자기 바쁘다. 이게 무슨 삶일까? 이러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아 치맥 땡긴다.
요가 대신 오늘은 좀 걷자 싶었다. 천천히 걷자. 빨리 걸었다가는 오랜만의 운동에 근육통이 올지도 모른다. 걸으니까 좋았다. 여름 끝물이라 날도 그리 덥지 않았다. 나랑 비슷한 모습을 한 인간인지 인형인지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휙 스친 머리카락 끝에 아침에 뿌린 향수 냄새가 옅게 번진다. 저절로 따라간 시선 끝에 마포대교가 보인다.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저 긴 다리도 걸을까? 중간까지 가서 후회하면 큰일인데. 여기서 버스를 타야 하나? 생각은 잠시,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허벅지에 자리잡은 하지정맥류가 그렇게 만든 걸까? 아님 저번 주 시즌 마감으로 반값 세일했던 신발에 마법이 걸린 건지. 나는 대교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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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대교 난간엔 더 이상 글귀가 새겨지지 않았다. 이걸 여지껏 몰랐다니. 하등 쓸모 없는 글귀가 눈만 아프게 반짝이긴 했다. 그래도 막상 없어지니 섭섭하네.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해준다는 것 만으로도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글귀 대신 어떤 수를 써도 떨어질 수 없게 높은 울타리를 세웠다. 그러니까 다른 데 가서 죽으라는 얘기지. 여기서 떨어지면 찾기 힘들 테니까. 하나 둘 씩 못 찾기 시작하면 한강은 썩은 내로 들끓을 것이다. ‘혹시 지금도 떨어져 있는 거 아냐?’ 하는 마음에 난간에 몸을 기대 봤다. 다행히도 내 눈에 들어온 건 퉁퉁 불은 시체가 아니라 물에 비친 도시의 야경이었다. 흔들 흔들 바람에 따라 미역처럼 흔들린다. 나 그러고보니 쌀밥을 먹은 지는 얼마나 되었지?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도시가 발하는 빛이 괜히 내 마음을 위로한다. 저들은 나보다도 더 늦게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일 텐데. ‘내가 차라리 낫구나’ 하는 마음일까? 아니면 동병상련의 마음일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하고 내뱉어 봤다. 먼지 반 공기 반이었을 테지만 속은 조금 시원해졌다. 괜히 눈물이 고인다. 나도 웃겨 정말. 이젠 정말 아무 감정도 안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 따라 도시의 별이 밝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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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에서 배우는 유명한 영웅들 대신에 사실상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위처럼 아주 소소하고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하는 모든 행동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지금 당장 힘든 일이더라도 결국 앞으로 한 걸음 더 이동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오늘 당신의 밤이 평소보다 어둡다면 그만큼 별이 더 빛나기를, 그 빛나는 별을 두 눈에 담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에디터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