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유수(行云流水)

행운유수 (行云流水)
행운유수 (行云流水) : 하늘에 떠가는 구름과 쉬지 않고 흐르는 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
1. 흐르다
둥글게 뭉친 구름이 하늘을 유유히 떠나간다.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니면 또 어딘가로. 아무튼 한방향으로 그냥 주욱 간다. 허허로운 눈으로 굽은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본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내방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먼지덩어리 같기도 하고, 파쇄기에 갈려 바닥에 무수히 쌓인 종이 찌끄래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구름은 계속 흘러 갈거고 나는 출근을 할 텐데. 어제 비가 와서 건물에 진득히 붙은 파이프에 물소리가 들린다. 하수구 구멍으로 흙더미를 잔뜩 껴안은 빗물이 주륵주륵 떨어진다.
故신해철의 노래 <현대인> 속 가사처럼 아무도 말없이 그저 자기한테 맡겨진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흐른다. 단전 밑에서부터 한을 품은 숨이 새어나온다. ‘이럴 거라면 구름이나 물로 태어날 걸, 일이라도 안 하니.’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삶을 ‘쳇바퀴’에 비유하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업무와 행동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같은 삶의 반복 속 지루함과 회의감은 삶에 대한 의욕을 꺾어버리기도 한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삶을 살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을 살 텐데, 내가 주어진 인생의 길을 따라 계속 걸어야 할 이유가 뭘까? 나는 왜 살아야 할까?
이종호 작가의 작품 역시 우리가 삶에서 끊임없이 마주치는 ‘반복’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어제 오늘 같은 나의 삶과 달리 어딘가 재미를 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서 나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재미를 발견하게 될 순 없을까?

2. 차이와 반복

어떤 노래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들어본 경험이 있는가?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우리도 모르게 같은 노래 속에서도 차이를 찾아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음률에 집중했다면 다시 들었을 때는 가사가 와 닿고 그 다음엔 가사 속에 숨겨진 화자의 마음이 보일 수도 있고 안 들렸던 악기의 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실은 같은 음악을 계속해서 듣고 있는 게 아니다.

무지개 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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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모란꽃이 대지 위에 자라 있다. 구름을 흘려보내는 바람에 따라 하늘하늘 몸을 꺾는다. 1분이라는 짧다면 짧다,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시간동안 모란꽃 무리는 그저 흔들거린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면 이번에는 한쪽 손을 쭉 피고 느리게 날아가고 있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보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대지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 그 다음엔 떨어진 모란꽃잎 위에 자란 나무, 구름 위 앉아 있는 사람, 모란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도 보일 것이다. 좋은 작품의 의미 있는 반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의 반가움이 느껴질 것이고 이 느낌은 영상의 말미에 다다를 때 그와의 아쉬움을 자아낼 것이다. 구름을 타고 발을 흔들거리며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동화돼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반복은 차이를 발견할 수록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민화 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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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명화 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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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여행을 즐기고 마지막에 다다르자 다시 처음으로 이어지는 <민화 속 여행> 역시 반복 속 차이를 찾아내며 보는 자들에게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놀이동산에 있는 모노레일을 타고 풍경을 구경하는 듯이 진행되는 이 작품은 관자가 더 많은 차이, 더 작은 차이까지 찾아낼 수 있도록 여정을 반복시킨다. <독일 명화 속 여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제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의 <겨울 풍경>, <성당>,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등의 명화를 소재로 쓴 이 작품도 더 많은 명화를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찾아낼 수 있도록 관자를 여행의 굴레 속으로 밀어 넣는다.

3. 물처럼, 구름처럼

같은 굴레, 다른 삶.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존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작품 속에서 느꼈던 것으로부터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찾을 수는 없을까? 이 세상이 나쁜 놈들을 멋진 발차기로 날려버리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날아다니거나 구름 위에 앉아 신선놀음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만 적어도 ‘반복’에서 오는 지긋지긋한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힐링’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것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작은 것에서 즐거움 찾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꿔 말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매일 매일 같은 삶을 더욱 충실히 살면서 다른 점을 찾아야 한다. 이 ‘다른 점’은 이종호 작가의 작품처럼 즐거움을 줄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쩌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다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줄 지 모른다. 삶을 영원히 반복되는 연옥으로 보기 보다는 1년을 한달로, 한달을 몇 주로, 몇 주를 며칠로, 며칠을 몇 시간, 몇 분, 몇 초로 쪼개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모란이 흐드러지게 핀 화분을 담은 작품이 그걸로 다가 아니듯이, 전체적으로 작품을 바라보았다면 가까이서도 보고 얼굴을 더 들이대 더 면밀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차창 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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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견뎌 냈다면 눈을 감고 천천히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건 어떨까?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처럼 똑같은 하루를 다시 한번 더 살아본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의 주제처럼 오늘, 이 시간은 결코 평범한 하루와 매번 같은 시간이 아니었음을, 어제와 같은 오늘도, 내일 올 시간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면 시선의 각도를 변화시켜 보자. 아스팔트를 비집고 솟아오른 기특한 풀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촌스러운 사각 간판을 달고 줄지어 있는 가게들을, 그 안에 들어있는 손님들을 오늘은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정말 많이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처럼, 구름처럼’은, 결코 한결같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방금 떠나간 구름이 곧 떠오를 구름이 아니고 방금 흐른 물은 아까 흐른 물이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언제든 새롭게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존재이다. “
에디터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