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화백과 그의 묘법

박서보 화백과 그의 묘법
박서보 화백(1931~)은 1950년대 말, 한국 추상미술인 앵포르멜에 이어, 단색 회화를 이끈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다. 특히 그는 ‘재료의 물성과 행위’를 통해 한국 전통의 고유한 정신과 조형언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박서보의 대표적인 작품은 <묘법 描法> 시리즈이다. 1967년에 첫 시도가 된 ‘묘법’ 시리즈는 ‘그린다’는 행위를 ‘지운다’는 행위로 이행시킴으로써 그의 회화세계의 결정적 변화를 맞이한다.
1971~1980 전기 묘법 : 행위와 물질을 대결시키다
70~80년대 전기 묘법(Ecriture) 시기의 작품이다. 당시 초등학생인 아들이 네모칸 공책에 글씨를 쓰다 망치면 연필로 지워버리는 모습을 보고 시작된 작업이다. 기록과 기록의 지움을 화면에 담아내는 실험이었고, 이는 박서보 화백이 새로운 예술세계로 진입하는 출발점이었다.
초기 묘법은 캔버스에 회백색이나 미색 물감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 드로잉을 반복했다. 같은 행위의 누적으로 작품이 완성된다. 이러한 반복적인 행위는 목적이 없는 순수한 행위로, 동양적 수행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박서보 화백은 “묘법은 마음을 비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표현하기보다 그것을 감춤으로써 한 단계 승화된 미의식에 도달하려는 행위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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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ture 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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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화백은 전기 작품의 색을 보고 백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백자에 심취되어 있을 때 밤에도 자다가 이조 백자, 접시 사발 등을 사다 놓는 꿈을 꾸었다. 밤에 불을 켜고 보는데, 마치 사발 속에 물이 담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빛을 받은 퍼런 색에서 정결함, 순결함을 느꼈다. 그런 색을 표현하고 싶어 회백색, 유백색, 우윳빛깔 등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즐겨 사용하던 색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 행위와 물질이 하나가 되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중대한 전환기를 맞는 중기 묘법 작품은 지그재그라고도 불린다. 앞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졌던 한지를 적극적으로 캔버스에 채용한다.
몇 겹으로 겹쳐 만든 패치라 부르는 작은 한지의 조각들을 화면에 붙인 다음, 그것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긁으면서 한지는 밀리거나 찢기면서 뭉쳐진 덩어리와 연필로 그은 흔적들이 남게 된다. 이렇게 물질과 행위가 하나로 결합하여 행위가 물질에 녹아들면, 결국 행위의 기록만이 남는다. 작은 한지 조각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면서 방향 없이 불규칙하게 화면 전체에 퍼지기도 하고, 일정한 규칙성을 유지하면서 리듬감 있게 화면을 채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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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ture 870907

“이 녀석(Ecriture 870907)은 아쉬움이 많은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새벽까지 작업을 하던 중에 어느덧 동이 트고, 아들놈들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서 붓을 내려놔 미완성으로 남았다. 내 손길을 한 번이라도 더 주지 못해 미안 하기만 하다. 내내 눈에 밟히던 이 녀석을 뜻하지 않게 런던 화이트큐브 전시에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나는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으로 녀석을 좋은 주인에게 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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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ture 910720

1990년대부터 보라, 노랑, 빨강 등 다양한 색조가 입혀진다. 화백은 해당 작품 색에 대해 “보라도 아니고 분홍도 아닌 묘한 꽃들이 있다. 지나가다 꽃 파는 곳에서 발견하면 그걸 사버리고 만다. 조그만 화분을 테이블에 놔두고 보면서 느껴지는 것을 담았다.” 라고 말한다.
2000년대 초반 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2000년대에 이르면 지그재그 행위가 사라지고 화면 전체에 가지런하게 단순한 선만 남는 후기 직선 묘법에 들어선다. 지그재그 묘법은 손과 마음이 즉흥적으로 교감하면서 자연스럽게 느낌을 따라서 전개되었다면, 후기 직선 묘법은 복잡한 패턴에서 벗어나 단순화된 수직선의 돌출된 입체감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러한 돌출된 수직 질감은 마치 바람에 이는 잔물결처럼 무한한 자연의 변화를 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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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ture 0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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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직선 묘법의 특징인 철저하게 계획된 사전 구상과 정제된 엄격함은 행위하는 자아의 흔적 조차 무색, 무취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화백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절대성으로의 회귀에서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담담하게 빨아들이는 흡인지로서의 예술, 즉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화백의 신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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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ture No. 150915 (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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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이후의 후기 색채 묘법은 보다 돌출된 질감과 화려한 색감이 나타난다. 자연으로 부터 찾아낸 색들을 작품에 담아내면서, 묘법의 영역 안에 ‘색을 쓴다'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고, 색을 통해 자연과 합일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나타난다.
작성 서보미술문화재단